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가키 가즈시게 (문단 편집) ==== 식민지 총독 ==== 조선인들에 대해 개인적 호의를 가졌을 수도 있지만 그도 어디까지나 천황을 대리하는 총독이었으므로, 당시 조선이라는 일본의 영토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선일체]]보단 덜했지만 '''내선융화'''를 강조했으며 조선어 교육시간을 줄이기도 했다. [[1932년]]에는 [[장충단공원|장충단]]에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와 [[이완용]], [[송병준]] 등의 친일파를 기리는 [[박문사]]를 박아넣기도 했다.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3060709435793905|#]] 이 때문에 그의 시대는 2기 문화정치(민족분열정치)와 3기 전시체제(민족말살정치)의 과도기로 여겨지곤 한다. 광산 정책은 총독부의 자금으로만, 또 장진강 수력발전공사의 전력은 일본의 [[노구치]]사의 [[흥남]][[비료]]공장에 대부분이 돌아갔다. 또 "남면북양(南綿北羊)[* 조선 남부에서는 [[면화]] 농업을, 북부에서는 [[양(동물)|양]]을 중심으로 한 모직 [[목축]]업을 장려하겠다는 정책.]"과 2차 [[산미증식계획]]으로 대표되는 "농촌진흥운동"은 당시 조선의 농민들 대부분이 소작농 + [[문맹]]이었던 상황이라 근본적으로 사회구조가 뒤바뀌지 않는 이상에 큰 효과를 내기 어려운것이었는데[* 애초에 1920-30년대에 조선에서 쌀 수출량이 대폭 늘었났음에도 실질적으로 농민들이 만주로 이민가느냐니 북부지역 도시로 가야했다느니 했던 것도 바로 이것때문이었는데 산미증산계획으로 일본인들은 싼값에 쌀을 먹을 수 있어서, 지주들은 돈을 대거 벌수있어서 이득이었지만 쌀 수출이 늘어난다 해서 그 이득이 소작농들에게 돌아가는건 아니었고 되려 소작농들은 고율의 소작료를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때문에 소작농들은 별수없이 시궁창스러운 삶을 살아야했다. 조선총독부에서도 이런 상황은 모른건 아니었지만 소작농들의 희생으로 본토의 쌀값이 안정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굳이 시정하려들지 않았다. 그러니 효과가 제대로 나기가 힘들었던 것.] 이런 현실은 극복하지 않고 "자력갱생 정신교육"만 쑤셔넣은 것이다. 결국 농업진흥정책은 총독이 스스로 [[각반]]을 차고 조선 전역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참여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시행정]]이 되어버렸다는 비판도 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